유월절 날짜, 매년 바뀌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월절 날짜는 유대 종교력으로 1월(닛산월, Nisan) 14일 저녁이다. 유대 종교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태양력으로 3~4월경에 해당하기 때문에 매년 날짜가 조금씩 바뀐다. 하지만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유대 종교력 1월 14일 저녁이며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서술한 유월절 날짜 문제를 읽고 오늘날의 기독교와 연관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도 유월절이 있고 이 유월절 날짜 역시 매년 바뀐다. 유월절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시초문인 이들은 아주 아리송할 것이다. 유월절 날짜 문제에 올바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교회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유월절 날짜 올바로 지켰던 예수님과 초대교회 성도들

우선 교회사를 알아보기 전에 신앙의 중심이신 예수님의 예를 살펴보자.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셨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22장 15절

이 한 구절만으로도 앞선 의문은 깔끔하게 정리된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셨다. 그것도 지키기를 원하고 원하셨다. 이처럼 분명한 구절이 존재함에도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억지를 부리는 이들이 종종 존재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예수님 돌아가신 날은 언제인가’라는 포스트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셨듯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유월절을 지켰다(고린도전서 5:7~8 참조). 그것도 세상 끝날까지 지키자며 결의했다.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예수님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지켰던 소중한 절기를 오늘날에 와서는 왜 지키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도들이 진리를 버리고 편안과 안락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영원히 지켜야 할 유월절이 변질되고 사라진 역사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로마교회의 성장 그리고 변질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직후, 로마교회에는 노예나 하층민 등 당시 천대받던 이들이 주로 입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류층과 귀족 신자들도 하나둘 늘어났다. 로마교회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신자들을 등에 업고 인근 교회에도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긍정적인 영향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로마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유월절과 부활절을 일요일에 함께 지키는 기행적 풍습을 만들어냈다. 유월절과 부활절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절기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날로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유월절 날짜는 ‘유대 종교력 1월 14일 저녁’인데 반해 부활절은 ‘무교절 후에 오는 첫 번째 안식일의 다음날’이다(레위기 23:10~11, 사도행전 20:6~7, 고린도전서 15:20 참조). 유월절과 부활절을 같은 날에 기념하는 것은 애당초 성경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래 도표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유월절 무교절 부활절 초대교회의 진리

이렇다 보니 유월절 주간에 예루살렘 등지에서 로마를 방문할 때는 웃지 못할 상황들이 발생하고는 했다. 분명히 유월절을 지키고 로마에 도착했는데 이제서야 유월절 성찬식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혼란이 계속되자 결국 한 차례 논쟁이 발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155년경 발생한 ‘제1차 유월절 논쟁’이다.

제1차 유월절 날짜 논쟁

155년경,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갑(Polycarp)과 로마교회의 감독 아니체토(아니케터스, Anicetus)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사도 요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폴리갑은 반드시 닛산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아니체토의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양측은 각자의 방식대로 유월절을 지키기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유월절 논쟁, 폴리캅, 교황 아니체토

하지만 서로 합의를 했어도 이 논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167년에 키드 박사(Dr.Kidd)는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을 십사일 주창자(十四日主唱者, Quartodecimans)라고 칭하며 유대주의에 빠져있다고 힐난했다.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맘때쯤 라오디게아에서는 닛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던 자들이 부활절에 성찬식을 하자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기도 했다. 좌우지간 유월절 날짜 문제는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휴화산 같은 사안이었다.

제2차 유월절 날짜 논쟁

이렇듯 예민하기 그지없던 유월절 날짜 문제는 197년경 로마교회 감독 빅터(빅토르 1세, Victor I)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점화되었다. 빅터 감독은 ‘도미닉의 규칙’을 발표했는데 이 내용이 워낙 강경하다. 내용인즉슨 “일요일에 성찬식 안 해? 그럼 넌 이단”이었고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하는 로마에 위치한 교회에서 나온 발언이니만큼 동·서방 교회 각지에서는 난리가 났다. 결국 아시아의 몇몇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이 ‘도미닉의 규칙’을 따르기로 결의했다.

제2차 유월절 논쟁, 교황 빅터, 폴리크라테스

하지만 빅터의 뜻을 따르지 않은 감독들도 있었으니 그 중 대표적인 이가 바로 에베소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다. 그는 편지 속에 자신의 견해를 담아 빅터에게 보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은성출판사, 294~295쪽 “우리는 진정 올바르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 것도 덧붙이거나 감하지 않았습니다. …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인 빌립과 … 순교자였던 요한도 에베소에 묻혀 있습니다 … 이 사람들은 모두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신앙의 규칙을 따르면서 복음에 따라 14일을 유월절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 폴리크라테스는 비록 당신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내 전임 감독들의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 전임 감독들은 항상 백성들이 누룩을 없앤 날을 지켜왔습니다 … 나는 나를 협박하기 위해 취해지는 모든 일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나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들은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걸 보고 빅터가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넘어갈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도미닉의 규칙도 반포할 일이 없었을 터. 편지를 보자 빅터는 곧장 폴리크라테스의 에베소교회를 비롯한 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을 비정통으로 몰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교회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었기에 일부 반발의 목소리도 있었고, 결국 빅터는 파문 조치를 취하했다.

왜 이토록 문제가 되는가

유월절 날짜 문제는 좀처럼 접점이 보이지 않는 일종의 난제였다. 그런데 유월절과 부활절의 차이는 길어봐야 7일가량이고, 그나마도 유월절이 일요일이고 부활절이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되는 아주 희귀한 경우다. 겨우 일주일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동·서방 교회들은 이 일주일 때문에 이토록 목소리를 높이는가? 그것은 양측이 모두 자신들의 방식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옳은 방법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준은 성경에 입각해야 한다. 성경에 입각하지 않은 논리는 아무리 화려하고 그럴싸해도 사람의 의견일 뿐이고 다른 복음이며 저주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미 로마교회를 필두로 한 서방의 교회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유월절의 변질은 서서히 완료되어가고 있었다. 두 세기가 더 흐르고 나서야 유월절 날짜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는데, 의외로 논쟁을 끝낸 주인공은 동·서방 교회 어느 쪽의 감독도 아니었다.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해 유월절 날짜는 결정되었을까? ‘부활절을 유월절[Pascha]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라는 포스트에서 계속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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